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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개

[신간안내] 최초로 조선 땅을 밟은 선교사 『언더우드』 생명의말씀사

언더우드

#언더우드#선교사#한국선교#최초선교사

이희갑 글 강수진 그림

ISBN:

978-89-04-16706-7(03230)

분 야:

신앙일반

판 형:

148*210 280페이지/무선날개

정 가:

16,000원

발행일:

2020년 5월 10일

입고일:

04월 29일

 

불꽃 열정으로 이 땅을 밟은 첫 선교사

언더우드가 남긴 발자취를 따라가다

 

하나님의 충실한 종 언더우드 선교사의

사명, 사랑, 순종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오후, 굳게 닫혀 있던 ‘은둔의 나라’ 조선에 첫발을 내딛었던 언더우드 선교사. 험한 길임을 알고도 주님이 맡기신 사명 하나를 바라보며 병마와 온갖 시험을 이겨 낸 믿음의 용사. 그가 사명을 끝내고 하나님께로 부르심을 받은지 100년이 되는 오늘, 말씀 위에 굳게 서서 주의 일을 감당했던 증거들을 따라가 본다.

 

 

판사 서평

 

한국을 찾아온 최초의 선교사, 언더우드

우리는 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언더우드는 한국 기독교 100년에 빛나는 가장 대표적인 선교사이자, 기독교 역사에 영원히 남을 위대한 선교사이다. 이 책에는 1885년 26세의 나이에 조선에 첫발을 내디딘 그가 1916년, 57세의 나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까지, 30여 년간 한국 선교에 목숨을 걸고 평생을 바친 언더우드 선교사의 일대기를 담았다. 또한, 그의 어린 시절과 그가 한국 선교에 대한 소명을 받기까지의 과정도 흥미진진하게 그려져 있다. 그의 일대기를 따라가다 보면,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했고 한국을 사랑했는지, 얼마나 불꽃같은 열정으로 복음을 위해 그의 생애를 불살랐는지, 감동과 경이로움을 느끼게 된다.

언더우드는 복음 전파뿐 아니라 한국의 정치, 문화, 교육 등 한국 사회 전반에 수많은 놀라운 업적을 남겼다. 그는 한국 최초의 조직교회인 새문안교회를 세우고, 성경을 번역 보급하여 말씀 중심의 신앙을 세워나갔으며, 최초의 보육원과 학교를 세웠을 뿐 아니라, 오늘의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를 세웠으며, 문서선교와 인재 육성에도 힘쓰는 등 한국 사회를 위한 지대하고 전반적인 영향을 끼쳤다. 더구나 그의 위대한 한국 사랑은 그에게서 끝나지 않고 그의 후손들까지 이어져 4대에 걸친 한국 사랑의 모습을 지금도 보여주고 있다.

이 책에는 언더우드가 영향을 주었던 한국의 대표적인 인물들의 에피소드도 실려 있는데, 김규식, 안창호, 이승만, 서경조 등이다. 언더우드가 얼마나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책은 동화 작가 이희갑 작가의 친근하고 생동감 있는 글로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단숨에 읽힐 만큼 쉽고 재미있게 쓰였으면서도, 철저한 역사 자료와 고증을 거쳐 정확하고 자세한 역사적 정보까지 놓치지 않았다. 따라서 각 주일학교와 청장년에 이르기까지 온 교회와 학교가 함께 읽고 선교의 정신을 배우며 선교의 비전을 키울 수 있는 책으로 추천할 만하다.

 

<이 책의 특징>

 

1. 한국을 찾은 첫 선교사 언더우드의 삶과 신앙을 생생하게 다룸.

2. 새문안교회를 시작한 언더우드 선교사 역사관에 보관된 귀중한 자료와 감수를 거쳐 집필.

3.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는 일러스트 수록.

4. 한국의 초기 선교 상황을 폭넓은 연령대가 읽을 수 있도록 집필.

 

 

 

저자 소개

글 이희갑

40여 년간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교회에선 장로로 섬기면서 작가의 길을 걷고 있다. 1984년에 한국 문인협회-월간문학 신인작품상 수상으로 등단했으며, 『동우와 트라이앵글』(삼성당), 『작은 새의 노래』(한교) 등 다수의 동화책과 그림책에 글을 썼다. 또한 『문익점』과 같은 위인전기나 『피노키오』와 같은 명작 동화를 새로 엮어 출판하기도 했다. CBS(기독교방송) ‘새롭게 하소서’에 출연했으며, FEBC(극동방송)에 동화책 『엄마의 얼굴』(규장)이 입체 낭송되었다. 다년간 ‘지하철 사랑의 편지’, ‘이슬비 전도 편지’ 등을 집필하고, 쉬운성경(아가페)의 교정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선교와 위로의 글을 많이 썼다. 현재는 한국문인협회와 한국아동문학인협회 회원이자, 사단법인 ‘어린이문화진흥회’ 부이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그림 강수진

대학에서 회화과를 졸업하고 여러 디자인 분야의 작업을 하면서 다양한 그림을 그렸다.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다가 지금은 아이들과 미술 수업을 하며 동물과 꽃을 그리고 있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순종을 통해 그분의 계획을 이루시는 하나님,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더욱 더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지는 언더우드 선교사의 삶과 마주하며, 우리의 삶도 그렇게 빚어지길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림 을 그렸다. 재학 시절 한국현대판화공모전에 입선하였고, 그린 책으로 『한주 동생 뚱주』가 있다.

 

감수 민현식

서울대 국어교육과 명예교수. 국어학자로 선교사들이 활약한 개화기 국어를 연구하고 있으며 제9대 국립국어원장을 역임하였다. 새문안교회 장로이자 새문안교 회 역사관장으로 섬기며 새문안교회 신축 역사관을 기획하였고, 대한성서공회가 발간할 ‘새한글성경’ 감수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목차

 

추천사 _ 이상학, 피터 언더우드, 윤경로, 서정민

저자 서문 _ 언더우드 생애 속으로 들어가면서

 

 

1부

조선 땅을 처음 밟다

1. 제물포에 부는 바람

2. 아름다운 신앙 가족

3. 새로운 세계 미국으로

4. 내가 간다, 조선으로!

언더우드를 만나 변화된 한국의 인물들 : 김규식

 

2부

언더우드의 불타는 조선 사랑

5. 제중원에서 시작한 선교 활동

6. 고아의 아버지가 되어

7. 한국에 심은 교육 나무

8. 이 땅에 새문안교회를

9. 한국어 속으로 뛰어들다

10. 한국어 성경 편찬

언더우드를 만나 변화된 한국의 인물들 : 안창호

 

3부

전국 방방곡곡 복음 전도 여행

11. 신혼여행, 그 머나먼 길

12. 땅 끝까지 복음을 들고

13. 조선 여인들의 만남의 광장

14. 찬송을 사랑한 선교사

15. 시련의 바람 속에서

언더우드를 만나 변화된 한국의 인물들 : 이승만

 

4부

조선의 독립과 복음화를 위해

16. 교회 개척과 YMCA

17. 조선 왕실과 함께한 시간

18. 기억이 머무는 곳에

19. 병마와 싸우며 버텨낸 순간들

20. 한국에 대학을 세우는 꿈

21. 아, 나의 사랑 한국이여

언더우드를 만나 변화된 한국의 인물들 : 서경조

 

나가면서 _ 언더우드의 별세 이후

감수자의 글 _ 언더우드의 생애와 선교 정신

부록 _ 언더우드 연보

 

 

추천사

 

하나님이 명하시는 대로 따르며 한국 선교에 최선을 다한 그가 가장 귀하게 여겼던 일에는 항상 한국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 사람을 사랑했습니다. … 이 책을 통해 한국의 은인, 한국 선교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언더우드의 정신이 다시금 한국 교회에 불길처럼 일어나 한국 교회와 한국 사회를 새롭게 하리라는 소망을 가져 봅니다.

-이상학(새문안교회 담임 목사)

 

 

험지 한국을 찾아와 선교한 언더우드 선교사님의 용기와 개척정신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한국 땅을 밟은 그분의 일생은 ‘오직 주님, 오직 말씀, 오직 선교’였습니다. …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읽고 개화기의 한국 땅에 와서 복음을 전하며 평생 한국을 사랑했던 언더우드 선교사님과 다른 많은 선교사님의 삶을 가슴속에 담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불어 더욱 많은 한국의 젊은이들이 그분들처럼 전 세계로 나가 복음을 전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피터 언더우드(언더우드 선교사의 증손자, IRC 대표이사, 미국 조지아주 한국 사무소장)

 

 

언더우드 선교사가 한국 사회와 기독교 전파에 이바지한 업적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많고 다양합니다. 한국 개신교 전파 130여 년이 되는 이때 출간된 이 한 권의 책이, 언더우드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잘 알리게 되리라고 기대합니다.

-윤경로(새문안교회 공로 장로, (사)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이사장)

 

 

한국 교회가 초기부터 널리 확장되고 놀랍게 성장한 역사에는, 개척자이자 하나의 밀알이 된 언더우드 선교사가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이러한 선교 정신은 오늘의 한국 교회에 더욱 요구된다고 생각합니다.

-서정민(일본 명치학원대학 교수, 동 대학 그리스도교연구소장)

 

 

 

본문에서

 

언더우드 선교사를 말할 때 한국의 개신교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가 한국에서 행했던 모든 일에는 ‘최초’란 말이 으레 붙습니다. 최초의 조직교회 설립, 최초의 보육원 설립, 최초의 세례, 최초의 성찬식, 최초의 유아세례, 최초의 찬송가, 최초의 총회, 최초의 총회장, 최초의 전문학교 설립 등 이루 다 말하기 어렵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한국에 왔을 때만 해도 한국에는 조직교회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언더우드 선교사가 한국에 온 이후 한국에 수많은 교회가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해를 거듭할수록 교회 수와 교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습니다. 이런 놀라운 일은 언더우드 선교사의 헌신적인 전도와 초교파적인 선교 활동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한 국의 개신교는 언더우드 선교사와 직간접으로 연관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 이 아닙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청년의 젊은 나이에 한국에 왔습니다. 그는 아무도 선뜻 가려고 하지 않던 한국(당시 조선)에 기꺼이 찾아온 것입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그의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충성한 우리나라 개신교의 위대한 선교사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 9p

 

 

언더우드 선교사는 오직 주님이 가라는 대로 가고, 한국 사람을 주님의 제자로 만드는 일에 일생을 걸었습니다. 전파한 복음이 한국 땅에 뿌리내리도록 보육원, 학교, 병원을 설립하고, YMCA를 통해 인재를 양성했으며, 한국 문화와 한글을 연구하여 한영사전과 영한사전을 출판했습니다. 또한, 찬송가 편찬으로 비로소 한국 사람들 입에서 찬송가가 흘러나오게 했습니다. 그는 한국의 정치, 외교, 문화 등 선교 외적인 일에도 큰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그와 함께한 한국 사람 중에는 역사상 기억될 인물들이 많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그 당시 세계 열방보다 약소국이었던 조선 땅에 새로운 문명과 가치를 심어 주고 비전을 준 위대한 주님의 사람이었습니다. -19p

 

 

‘내가 선교사로서의 꿈을 이루려는 나라가 바로 눈앞에 있다.’

언더우드는 입을 굳게 닫고 지난날을 회상했다.

1884년 12월 16일 미국의 서쪽 끝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행 기선을 타고 한 달 넘게 태평양을 건너왔다.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큰 바다와 오랜 항해는 처음이었다. 기선은 언더우드가 26세 되던 해인 1885년 1월 25일 일본 도쿄 옆의 요코하마 항구에 도착했다. 언더우드는 일본에 먼저 와 있던 선교사의 집에 잠시 머물렀다. 당시 조선은 *갑신정변이라는 사건이 일어나 매우 불안한 상황이었다. 그래 서 외국인은 쉽게 조선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언더우드는 일본에서 조 선으로 들어갈 날을 기다리는 동안 선교 사업에 필요한 훈련을 받으며, 일본에 와 있던 미국 선원들을 위한 전도 집회를 여는 등 선교 활동을 꾸준히 했다. 그럴 때 미국 감리교에서 조선으로 파송한 아펜젤러 선교사를 만났다. 그도 조선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29p

 

 

언더우드는 구세군 교회에서 하는 길거리 전도 사업에도 적극 참여했다. 언더우드는 전도하면서 인종, 계급, 출신, 교파 등으로 차별하며 파벌을 지어 대립하는 단체를 하나로 연합하는 운동을 했다.

“여러분은 예수 안에서 모두 한 형제자매입니다.”

언더우드는 나누어진 교회가 서로 연합해야 한다고 항상 주장했다. 이런 언더우드의 교회 연합 정신은 한국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언더우드는 일반 백성들뿐만 아니라 임금에서부터 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친구요 형제라고 말했다. 언더우드는 여러 갈래로 갈라진 교단의 벽을 걷어 버리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바로 외증조부 와우 목사의 교회 통합 정신이 그대로 언더우드에게 이어진 것이다. -56p

 

 

언더우드 선교사는 제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다가 떠돌이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은 대부분 부모가 없는 아이들이었다.

“부모 없이 아무렇게나 내쳐진 저 아이들을 어떡하나. 저 아이들 도 하나님이 사랑하는 생명들인 데.”

언더우드는 제중원에서 일하면 서 아이들과 가까이하는 동안 그 들이 얼마나 인간 취급도 못 받으며 불쌍하게 사는지 알게 되었다.

“그래, 저 아이들을 내가 돌봐야겠구나. 이런 것이 선교 아닌가.”

언더우드는 조선에 들어온 그해 말, 고아원 설립을 추진했다. 당시 까다롭던 조선 관리들이 고아원에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는지 의외로 허가를 쉽게 내 주었다.

“됐다. 이건 하나님의 은혜다.”

언더우드는 고아들을 불러 모아 그들을 돌봐 주고 가르쳤다. 고아원 원장은 조선인이었지만 실제 운영은 언더우드가 맡아 했다.

언더우드는 고아원과 배움터 역할을 하는 *구세학당을 경영하면서 선교사와 선교사 부인들의 힘을 빌었다. -83~84p

 

 

언더우드는 학당 일에 열심을 다하며 교회 구역마다 초등학교를 세웠다. 언더우드의 노력으로 세워진 학교는 겨자씨 같은 작은 시작이었지만, 시간이 가면서 점점 커다란 나무처럼 성장해 갔다.

언더우드를 비롯하여 그와 비슷한 때에 활동한 다른 외국 선교사들도 학교를 세우기 시작했다. 그래서 1902년에는 장로교선교회에 속한 학교가 63개, 학생이 천여 명 생겨났고, 1909년에는 학교가 589개, 학생이 이만 이천 명에 이르렀다.

언더우드는 교육 선교를 위해 힘썼지만 앞으로 한국을 복음화하기 위해선 좀 더 적극적인 선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 이젠 신학교를 세울 때가 된 거야.’

언더우드는 전에 자신과 뜻을 같이하던 헐버트 목사에게 언젠가 꼭 한국에 대학교와 신학교를 설립하겠다는 희망을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말처럼 학당에 신학반을 개설해서 앞으로 한국 선교의 지도자가 될 인재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평양에 세워진 장로회신학교에까지 가서 강의를 했다. -96p

 

언더우드가 경신학교 대학부 초대 교장으로 취임한 이후에도 총독부는 학교 설립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고, 일본은 대학 설립을 방해하기 위해 별의별 교묘한 방법을 총동원했다. 그 하나의 예가 한국에 대학을 두는 법령을 만들어 놓지 않은 일이었다.

언더우드는 할 수 없이 전문학교령에 의해 경신학교 대학부를 연희전문학교로 인가를 받아 세울 수밖에 없었다. 연희전문학교는 해방 후 1946년 연희대학교로 승격했고, 1957년 세브란스 의과대학과 합병하여 지금의 연세대학교로 자리 잡았다. 일제 당국은 언더우드가 세운 대학을 따가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들은 언더우드를 늘 감시하고 있었다. -234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