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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분 쪽독서

주라 그리하면 채우리라 - '예수님을 만나다.' (전광 글, 양영자 말, 생명의말씀사) 양영자 선교사

 

 

"팔목 통증이 인도한

신앙의 길"

 

어느 정도 어둠이 있어야 행복도 존재한다.

행복에 상응하는 슬픔이 없다면,

행복은 그 의미를 잃어버리고 만다.

_ 칼 융

 

 

탁구선수 생활을 하는 동안 누구나 그렇듯 내 삶에도 빛과 그늘이 공존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탁구 국가대표로 발

탁될 만큼 주변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승승장구했지만, 늘 육체적인 고통과 씨름해야 했다. 승부에 대한 집착이 강했던 만큼 훈련의 강도도 높았고, 몸을 늘 혹사할 수밖에 없었다. 육체적인 한계는 선수인 내 발목을 잡기 일쑤였다.

그 시작은 캐나다에서부터였다. 1980년, 나는 세계탁구대회 혼합복식 결승전을 앞두고 있었다. 말이 필요 없는 마지막 중요한 경기였다. 이미 다른 경기에 다 패했고 우리 팀에게 남은 것은 이 경기밖에 없다. 그래서 모든 희망은 이 한 경기에 집중되어 있었고, 모두가 긴장하며 좋은 성적을 거두기 바라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경기를 앞두고 선수들만 긴장한 것이 아니었다.

그때만 해도 외국에서 경기가 열리면 현지 교민들이 김밥을 싸 들고 경기를 관람하러 나왔다. 교민들은 타국에서의 고단한 삶과 설움을 고국 선수들의 경기를 보며 풀었다. 경기에서 우리나라가 금메달이라도 따면 교민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눈물을 펑펑 쏟았다. 그 정도로 기대가 컸기 때문에 선수들은 그런 부담감까지 떠안아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경기를 앞두고 있었는데 갑자기 팔에 통증이 느껴졌다. 단순히 통증만 느껴진 것이 아니라 갑자기 팔이 위로 올라가지 않는 것이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테니스 엘보’(손목 관절에 무리한 힘

이 가해져 근육이 찢어지는 증상)로 나중에 병명이 밝혀졌는데, 그때 나는 팔목 통증이 너무 심해 팔을 들 수도 내릴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마지막 중요한 경기를 포기한다는 것은 우리 팀과 나에게, 그리고 교민들에게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할 수 없이 아픈 팔을 이끌고 병원을 찾아갔다. 담당 의사에게 진통제를 좀 놓아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담당 의사는 건강에 해롭다며 진통제를 처방해주지 않는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팔이 아플 때면 관절주사로 진통제를 맞곤 했는데. 어쩔 수 없이 나는 근육 이완제를 팔목이 얼얼할 정도로 바르고 압박붕대를 감았다. 그랬더니 가만히 있어도 손이 이리저리 왔다 갔다 했다.

그런 상태에서 경기를 치렀다. 혼합복식이어서 나는 주로 상대방의 공격을 받기만 하고, 주로 남자 선수가 공격을 전담했다. 고통을 참으며 그럭저럭 경기를 진행할 수 있었고 천신만고 끝에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경기였다. 그런데 그때 발병한 ‘테니스 엘보’가 내 삶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게 된 것이다. 그 섭리의 오묘함은 정말 인간의 예상을 뛰어넘는다. 나는 고통을 통해 하나님께 그렇게 다가가게 되었다.

 

 

'예수님을 만나다'

캐나다에서 돌아온 후 팔목의 통증이 주기적으로 나를 괴롭혔다. 진통제를 맞았지만, 진통제는 맞을 때만 잠시 반짝할 뿐이었다. 탁구를 그만두면 괜찮아질 수 있었으나 탁구를 포기한다는 것은 불가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학교가 끝나면 먼저 교회로 향했다. 하나님께 내 팔이 나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한 뒤에야 집으로 돌아갔다. 기도는 했

지만 나아지는 건 없었다. 계속 진통제를 맞으며 훈련을 하고 대회에도 출전해야 했다. 그 기간이 거의 6년이었다. 결국 한계에 도달했다.진통제 효과가 없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때가 1983년 개인단식 은메달을 딸 즈음이었는데 매우 중요한 시점이었다. 세계대회 개인단식 준우승으로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해야 할 전환점이었다. 오히려 한 계단 위로 뛰어올라야 하는 상황인데 테니스 엘보가 내 발목을 꽉 움켜쥔 것이다. 더는 의학적으로 할 수 있는 조치가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언덕은 단 하나, 신앙이었다.

당시 나는 제일모직 탁구단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나와 함께 선수 생활을 하던 한 선배 어머니가 아주 신실한 분이셨다. 이분이 내 이야기를 듣고는 기도원에 가보기를 권하셨다. 하지만 나는 그다지 마음이 내키질 않았다. 기도원이라는 곳도 낯설게 느껴지고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기도 했다. 그렇지만 어떤 방법으로도 해결이 안 되니 달리 도리가 없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매달리며 낫기를 구하는 일인데 가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고통을 피하려면 탁구를 그만두어야 했는데 그것은 아픈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이었다. 결국, 나는 기도원으로 향했다.

참으로 놀랍고 신비하다는 말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하나님은 나를 말씀 가운데로 부르셨다. 말씀으로 나를 만나주셨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해가는 방식은 정말로 예단하기 어렵다. 그저 모든 일이 지나간 뒤 비로소 깨닫고 감탄하는 것 외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궁지에 몰려 어쩔 수 없이 찾아간 기도원에서 나는 비로소 예수님을 만났다. 물론 그 이전부터 교회를 나가고는 있었지만, 내 신앙은 무척 막연하고 피상적이었다. 그저 어리고 미숙한 신앙이었다. 그런데 그기도원에서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던 것이다. 기도원 예배에 참석했는데, 그날 원장 목사님의 설교는 ‘복음’에 관한 내용이었다.

목사님은 “하나님이 세상과 인간을 아름답게 지으셨지만, 인간의 죄와 불순종으로 세상에 고통과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인간을 구하시려고 그 아들을 보내셨는데 그를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사실 이런 설교는 그 이전에도 여러 차례 들었던 내용이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전에는 무심히 들었던 말씀이 생생하게 가슴에 들어와 박힌 것이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것처럼 생생하고 선명하게 내 마음에 전달되었다. 이제는 그 말씀의 의미가 확연하게 이해되었고 큰 울림으로 다가와 내 마음속 깊이 퍼져갔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고통이 내 마음에 느껴졌고, 그분의 사랑에 감당할 수 없는 감동으로 마음이 물결쳤다.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내가 뭐라고, 나처럼 하찮은 사람을 위해 그분이 그런 참혹한 고통을 감내하셨다는 것일까. 나는 죄인이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럴만한 가치를 지닌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이런 나를 위해 죽음을 선택하실 수 있을까.

어린 시절, 내 아버지는 언제나 두려운 분이었다. 엄하고 늘 거리감이 있었는데 아버지를 한 번도 만져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어주시겠다고 한다. 예수님의 사랑도 감당하기 힘든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이 내게 주어진 것이다. 이 형편없는 죄인에게 영생이라는 선물이 값없이 주어졌다. 감동과 감격이 내 온몸을 휩쓸고 지나갔고 눈물, 콧물이 쉼 없이 쏟아졌다. 이 작은 몸뚱이에 그토록 많은 눈물과 콧물이 들어 있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펑펑 울며 마음 문을 활짝 열었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했다. 마음이 뜨거워졌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만난 기쁨과 감격이 온몸을 타고 오르는 것 같았다. 비로소 복음을 알게 되었고 온 마음으로 복음을 끌어안았다. 그때 바라본 세상은 이전과 달랐다. 세상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된 것이다. 내 마음과 영혼은 행복감으로 충만해졌고 나는 듯 가벼웠다.

나는 말씀에 힘입어 기도하고, 또 그곳에서 나를 위해 중보기도를 해주셨다. 그러던 중 놀라운 일이 내게 일어났다. 6년 동안 지독한 통증으로 나를 괴롭히던 팔이 순식간에 나은 것이었다. 진통제조차 듣지 않던 팔이 멀쩡해졌다. 통증이 더는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동안 좋다는 것은 다 해봤었다. 심지어 관절에 좋다는 고양이 삶은 물까지 먹

어봤고, 병원을 제집 드나들 듯이 살았었다. 그래도 낫지 않던 팔이 깨끗하게 나은 것이다. 내가 체험한 기적이었다. 1984년의 일이었다.

-1 / 04 _ 팔목 통증이 인도한 신앙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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